주인공은 선을 넘는다

🔖 민중은, 혁명의 본질을 몰랐을까? 로그 원 특공대는 자신들이 죽을지 몰랐을까? 자신들의 열망이 권력자에 의해 변질되고 좌절될지 몰랐을까? 자신들은 역사의 들러리일 뿐이라는 것을 몰랐을까? 아마 알고 있었을 것이다. 입으로는 위대한 혁명이라고 말해도 뒤로는 서늘한 기운을 느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지금 이 순간을 도저히 참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순간만은, 생판 모르는 이들과 연대한 그 순간만은, 참이 거짓을 이기고 진실이 승리한다.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아도, 설혹 결과가 나쁘더라도, 그 순간만은 역사의 주인이 된다. 그 순간은 찰나지만 영원하다.

들뢰즈는 니체의 '영원회귀'를 "지금 이 순간의 선택이 영원히 반복되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이 해석은 재미있다. 영원을 말하지만, 미래를 말하지 않는다. 미래를 위해 현재를 포기하지 않는다. 지금 이 순간의 행동이 끊임없이 반복될 뿐이다. 지금 이 순간 포기한다면 영원히 포기하는 것이다. 반면 지금 이 순간 포기한다면 영원히 포기하는 것이다. 반면 지금 일어서면 영원히 일어서는 것이다. 영원회귀, 순간은 영원하다.

아무리 혁명이 단순한 권력의 교차라 해도 혁명을 겪을수록 세상이 조금씩이나마 좋아지는 이유는 이 영원한 순간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 순간을 경험한 사람을 함부로 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누구나 이런 경험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용기 없는 사람은 평생 제대로 된 사랑을 경험하지 못한다. 그들은 영원한 찰나를 이해하지 못한다.

<로그 원>에는 스타워즈 시리즈가 시작될 때 꼭 등장하는 특유의 스크롤이 없다. 이 영화의 인물들은 스타워즈 역사에 기록되지 않는다. 그러면 어떤가. 그렇다고 그들의 인생이 가치 없는 것은 아니다. 아니, 가치 없다 해도 상관없다. 그것이 그들의 유일한 인생이었다. (...) 우리의 삶은 히스토리가 아니라 해프닝이다. 순간일 뿐이다. 역사에 기록되든 아니든 상관없다. 세상을 바꾸는 건, 기록된 역사가 아니라 한순간 일어나는 해프닝이다. 우리 인생에 스크롤은 필요 없다. 우리는 이름을 남기지 않는다. 지금을 살아갈 뿐이다.

당신과 나의 새로운 해프닝을 고대한다.


🔖 영화 <미세스 팡>은 보통의 영화라면 절대 신경 쓰지 않는 것에 집착한다. 영화는 누군지도 정확히 알 수 없는 팡슈잉 부인 한 사람의 침묵을 촬영한다. 최후의 순간엔느 촬영하는지도 인식하지 못하는 부인의 품위를 지켜주기 위해, 기꺼이 영화의 미덕인 스펙터클을 포기해버린다.

이 영화는 잘 만들어진 작품은 아니다. 재밌지도 아름답지도 않다. 하지만 이 영화는 위대하다. 이 작품에는 효율이 아니라 정신으로 써낸 스펙터클이 있다. 관객은 그녀의 죽음을 바라보며 시대가 버린 가치를 떠올린다.

결국, 문제는 사람의 몸값이다. 하지만 이제는 결코 자연적으로 이 가격이 상승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이제야 우리가 최초로 시장에 개입할 순간이 온 것인지도 모란다. 과거 시장에 대한 개입은(그것이 수정자본주의든 사회주의든 공산주의든 신자유주의든) 결국은 당시의 사회적 효율이 요구한 것이었다. 이제는 효율과 무관하게(어쩌면 효율을 무시하고서라도), 강제로 사람의 가치를 끌어올려야 한다. 법적 장치든 사회적 타협이든 그것만이 자본주의 속에서 개인이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것이 자본주의의 요구일지도 모른다. 자본주의를 포기해야만 자본주의가 살아남을 수 있다. 그렇기에 우리에게도 아직 일말의 가능성이 남아 있는 것이다.


🔖 이렇게 반문할 수도 있다. 미소와 나의 선택이 달랐던 건, 좋아하는 정도가 달랐기 때문 아니냐고,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나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포기했고, 미소는 진짜로 좋아하기 때문에 집을 버려서라도 포기하지 않은 것이라고. 하지만 반대로 생각할 수도 있다. 나는 포기했기 때문에 그것을 덜 좋아하게 된 것이고, 미소는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을 더 좋아하게 된 것이라고.

영화 속 미소는 복잡한 사람이 아니다. 사회에 대해 그리 큰 고민을 하는 것 같지도 않다. 하지만 그녀는 좋아하는 것을 선택함으로써 자기 뜻을 분명히 밝힌다. 사랑은 결정적일 때 드러난다. 백날 사랑해도 결정적인 순간에 도망치면 사랑하지 않은 것이다. 나와 영화 속 다른 인물들은 도망쳤지만 미소는 도망치지 않았다. 그게 이 영화의 역설이다. 미소는 집을 포기하지만 삶을 포기하지 않았고, 어디론가 떠났으나 도망치지 않았다.

(...)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이 없는 사람일수록 모든 것을 돈과 바꾼다. 우리에게 소중한 것은 거의 없다. 거의 없는 것을 늘려 가는 것, 결코 양보할 수 없는 것을 지키는 것, 자신이 위로받을 수 있는 미소 서식지를 지켜내는 것, 이걸 사랑이라 해도 좋고 취향이라 해도 좋다.


💬 과학 교양서를 읽고 글을 재미있게 쓰는 작가라고 생각해서 다른 책도 샀는데, 아나키즘에 대한 책이고 사회정치가 주제이지만 너무 개인의 캐릭터가 많이 들어간 글이라 그런지 이전 책만큼 좋진 않았다. 하지만 아예 책 도입부에 '나라는 캐릭터에 대해 풀 것'이라는 식으로 돼 있으니까.. 그래도 재밌었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들을 다뤘고, 종교에 대한 태도나 추첨제 이야기 같은 엥 이런 생각을? 할 만한 이야기들이 많이 있었다.